자두나무님과 만든 캐릭터로 한 편. 여캐 핥고 싶다고 징징대는 저를 가엽게 여긴-_-; 자두나무님이 은혜를 배풀어 초란 아가씨를 내려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흑흑흑... 남궁산이 제 캐릭터입니다. 이름답게 하염없이 궁상삽질... 괜찮아, 초란 아가씨만 핥을 수 있다면.
뭔가 쓰려고 했던 방향과 정반대로 나와버렸네요. 캐릭터란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없는 존재로다... 열폭애증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열폭은 둘째치고 애증 어디로 날아갔니.
자두나무님이 그려준 잉크를 같이 첨부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맞아죽을 것 같아서(...). 대강의 내용 줄기는 자두나무님 잉크 기반입니다. 한데 써놓고 보니 이상하게 길어서-_- 냉큼 접기.
“또 외출하십니까?”
초란은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당최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산은 가벼운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초란에게 다가섰다. 언제나 그렇듯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소리 없는 걸음걸음을 초란은 새삼 신기하다 생각했다.
“말도 않고 자리를 뜨시다니요.”
희미하게나마 질책 어린 산의 말에도 초란은 담담히 대꾸했다.
“말없이 사라진다고 네가 나를 찾지 못할 리 없잖느냐.”
“하하.”
겉으로는 태연히 웃으면서도 산은 내심 끓어오르는 속을 느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속을 끓이는 쪽은 항상 자신이다. 산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내고 짜증이 치미건만,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해 애가 타는데도 그런 산의 속내 따위 알 리 없을 초란은 언제라도 한 점 흔들림 없는 고요한 얼굴로 그를 부른다.
-산아.
아니, 차라리 자주 부르기나 하면 다행이지-산은 못마땅한 기분으로 짐짓 비꼬았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저도 온종일 아가씨 발자취만 쫓을 수는 없어서요.”
일개 호위 무사치고 무례하다 싶은 간언을 올렸음에도 초란은 가만히 산을 바라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언제부터인가, 한 발치 떨어진 곳에 서서 산을 향하는 눈은 결코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매도하는 듯 질책하는 듯,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이 그저 무심하고 검다. 초란이 저리 변한 까닭을 능히 짐작하기에 산은 그 시선이 싫었다. 하지만 산은 되레 웃으며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행선지 정도는 말씀해주시면 한숨 놓겠습니다만.”
“가지.”
그러나 초란은 이번에도 역시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대뜸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은 중얼중얼 불평을 곱씹으면서도 얼른 초란의 뒤를 따랐다.
초란을 따라 번잡한 시장 통을 헤매거나 몇 시간이고 후원을 느릿느릿 거니는 일은 물론 귀찮았다. 하지만 말도 없이 사라진 초란을 찾기 위해 속을 태우며 온 도성을 헤매고 다닐 바에야 차라리 몇 시간 귀찮은 편이 낫다고, 산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한초란.
이름 높은 세도가, 한 가(家)를 책임지는 주부이자 승상 한검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애하는 외동딸. 성정이 반듯하고 올발라 잘잘못을 가리는데 엄격한 것은 아버지를 꼭 닮았으나, 가차 없기로는 만년 빙설보다 더 하다는 한검과는 달리 아랫것들에게 자애롭고 공평하다 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허나 미모는 물론 그 인덕으로도 이름 높은 초란에게도 남에게 알려지면 난처한 괴벽 하나쯤은 있었다. 남몰래 집을 빠져나와 밖을 나다니는 버릇이 그 것이었다.
어느 날 초란이 홀연히 모습을 감춰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하인들이 나서 집안을 샅샅이 뒤진 것은 물론이요, 하루 종일 도성을 죄다 헤집었음에도 초란을 찾지 못했다. 귀한 고명딸이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을 듣고 해가 저물기도 전에 퇴궐한 한검이 마침내 사병까지 동원하려는 찰나. 잠든 초란을 등에 업은 산이 나타났다. 그 날 이후 초란이 말도 없이 사라지는 횟수는 더욱 잦아졌고 수법 또한 날이 갈수록 교묘해졌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초란을 찾아오는 이는 늘 산이었다. 결국 모든 이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한검의 명을 받아 산은 초란을 따르게 되었다.
그 뒤로 산은 항시 초란의 곁에 있었다. 잠시만 눈을 때도 간 곳 모르게 사라지는 초란의 기벽을 한 가(家) 식솔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에, 만사 제쳐두고 하루 종일 초란을 쫓아다니는 산을 새삼 왈가왈부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작 산은 신경이 쓰이고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집도 절도 없이 얹혀사는 주제에 쓰다고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내심 뇌까리며 산은 나붓나붓 걸어가는 초란의 뒷모습을 보았다.
꼼꼼히 땋은 검은 머리채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규칙적으로 흔들린다. 동그란 머리 꼭대기를 내려다보며 산은 참 작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도 참 작았던 초란은 여전히 작고 아담하고 가늘었다. 그 옛날보다 하나도 자라지 않은 듯 하다. 그럼에도 초란은 변했다. 기억 속 작고 어린 소녀는 어렴풋한 흔적만을 남긴 채, 전연 다른 사람 마냥.
-예전에는 잘 웃었는데.
사실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니다. 고작 3년 전까지만 해도 초란은 산을 향해 곧잘 울고 웃었다. 강호니 속세니 가문이니 하는 것에 관심도 두지 않을 만큼 어리고 철이 없던 시절. 제법 사이좋은 오누이 마냥 함께 손을 잡고 다니던 날은 어느덧 전부 지나버린 옛일이다.
“나는 애초에 내가 가는 곳마다 산아가 따라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리하여 완연히 변해버린 초란은 불쑥 저런 말을 던진다.
“……제가 없으면 누가 또 아가씨의 등쌀을 버티고요?”
“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하겠지.”
“그렇군요.”
산은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한다…… 실로 그러하다. 한 나라의 승상으로 누구보다 강대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한검이다. 그리고 초란은 다름 아닌 그 한검의 외동딸이다. 호위 한 명쯤 붙이지 않을 리 없는데다 호위를 맡을 인재가 부족할 일은 당연히 없을 터다. 산은 소맷자락 안에 넣어뒀던 부채를 활짝 펴서 얼굴을 가렸다. 우리 란 아가씨는 참말 매정도 하시지-뒷말을 들으라는 듯 덧붙인다.
순간 초란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또렷한 검은 눈이 산을 향한다. 산은 갸름하니 눈을 내리뜨고 시선을 비켰다. 허나 새삼스레 무례함을 책할 기색이라고는 없이 초란은 담담히 고했다.
“허니 내 발자취를 쫓는 것이 힘들다면, 주인의 행적을 잃어버려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해도 도리가 없지.”
“의미심장한 말씀이군요.”
산은 웃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웃을 수 있다. 그 것만은 자신이 있었다. 한시라도 평정을 잃는다면 목숨이 위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결 같아 그러므로 산은 언제 어느 때더라도 호흡처럼 쉽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봄 한 철 붉던 꽃이 시들어 지듯 웃는다.
-산아. 너는 검이다.
아직 살아있던 시절. 아버지는 산에게 말했다.
-명심하거라. 우리는 검이니 타인을 베는 무기 외에 무엇도 아니다. 검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검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담을 수도 없다. 그저 도구일 따름이니.
남궁 가(家)는 대대로 암살을 생업으로 삼았다. 가주는 주인을 선택했고 그 명을 받아 어둠 속에서 죽음을 행했다. 선택한 이상, 주인이 내리는 명은 절대적이었다. 생면부지 낯선 타인의 목숨을 끊는 행위는 오직 주인의 명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얻었다.
-무엇도 벨 수 있을 만큼 예리하고 결코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여라. 검은 그저 주인의 뜻대로 베는 것이다. 오직 그 것으로 족하다. 아무런 감상을 품지 않고 어떠한 이유도 묻지 않느니라.
산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말을 들었다.
-네가 검을 드는 것은 오직 주인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없다. 검은 의지가 없으므로. 우리는 오로지 명에 따라 베고 명에 따라 죽는다. 네 죽음은 주인의 명에 의한 것이며 그 것에 한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검은 주인의 필요가 사라지면 부러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아버지는 죽었다. 가문의 주인, 승상 한검의 명에 따라 밤을 달리고 검을 휘둘러 셀 수도 없는 죽음을 낳았던 남궁 가(家)는 반역이란 명목으로 모다 목이 떨어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들도. 팔다리는 갈기갈기 찢기고 목이 뎅겅 잘린 채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졌다고들 했다. 해가 저물었다 다시 떠오를 동안 쉬지 않고 타오르다 와르르 무너진 집은 폐허가 되어 그 자리에는 무엇도 남은 것이 없다고도.
산은 그 남궁 가(家)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적자였다.
한검은 드물게도 자비를 베풀어 유일하게 살아남은 역도의 아이를 거두었다. 등이 베이고 옆구리를 찔려 사경을 헤매던 어린 산을 일주일도 넘게 공을 들여 겨우 살려냈다. 피를 지나치게 흘려 정신을 잃고 며칠 동안이나 고열에 시달리던 산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초란이 그 큰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토끼처럼 발간 눈을 바라보다, 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울……. 아니, 우십……니까?
-산 오라버니.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초란은 산 옆에 엎디어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서럽고도 서글프게 울리는 울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참으로 많았지만 그 절박한 흐느낌 앞에서는 무엇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한가에 돌아오지 말란 말씀이신지? 저 같은 역도를 멋대로 놓아주셨다간 아가씨의 입장이 위태로워지실 텐데요.”
“그런 것쯤.”
그리고 초란은 미소를 띠었다. 차마 예상조차 하지 못한 반응이다. 평소 표정이 어리는 일이 드물기에 더욱 장절하고, 오만하며,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짙고 요염한 색을 띠고 초란의 단아한 이목구비를 덧칠했다.
“십년 전부터 각오한 일이지.”
얼굴을 가린 부채 아래에서-아마도 마침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탓이라는 편이 더 옳겠지만-산은 몹시 드물게도 웃음을 잃었다.
한초란.
처음에는 그저 작은 소녀였다. 금세 울고 웃던, 귀찮으리만치 뒤를 졸졸 따르던, 이름 모를 작은 소녀. 그러나 그 소녀는 지고한 창천 아래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는다는 한 가(家)의 여식이었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다. 그리하여 이 삶을 걸어 모시고 지켜야만 하는 산의 아가씨다. 하지만 도무지 그 속을 파악하지 못할 기이한 상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검의 딸이다.
그렇다. 초란은 한검의 딸이다. 누구도 그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초란이 태어났을 때부터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의 순간까지, 그 것은 확고하기 짝이 없을 진실이며 무엇보다 우선되는 초란의 정체성이다. 즉 초란은-
남궁 가(家)를 모함하여 멸족시킨 원수의 혈육이다.
-나는. 왜 이 곳에 남은 걸까.
산은 ‘그 날’ 이후 몇 번이고 반복했던 고민을 새삼 떠올렸다. 그 날, 먹구름 자욱한 하늘에 달조차 뜨지 않아 한치 앞도 볼 수 없던 어두운 밤에, 산은 감추어진 비밀을 하나 찾아냈다.
-한 승상입니다! 한 승상이, 남궁 가(家)를 역도로 몰아 죽였소!
밤이 무르익어 세상천지 모든 것이 한껏 숨죽였을 무렵. 산은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명’을 받았으니 그 명에 따라 검을 휘두르기 위함이었다.
산은 그 밤 많은 이를 베었다. 어둠 속에서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저택 안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 여자건 노인이건 아이건 산이 휘두르는 검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표적에게 검을 들이대었을 때, 놀랍게도 산은, 어렴풋이나마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저, 저는 한 승상님의 명대로 했을 뿐입니다. 관에 고하면, 역모라고 고변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해서, 일생 편히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주겠다고 해서……. 그 뿐입니다!
시간이 오래도록 흘러 이미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산은 그 생김과 목소리를 돌이켰다. 틀림없었다. 남궁 가(家)의 식솔, 어린 산을 돌봐주던 남자였다. 10년도 더 묵은 오랜 기억이 새삼 떠올랐음은 어린 시절 유독 얼굴을 자주 마주쳤던 탓이리라.
-살려,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한 승상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잠시 말을 끊으면 당장 고꾸라져 죽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죄와 삶과 바람을 떠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마침내 끝을 맺자 산은 묵묵히 검을 들어 올렸다. 달도 별도 없는 밤. 검신을 따라 파르라니 흐르는 예기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이윽고 어둠과 침묵을 그 몸에 휘어감아 찢어발기며, 검은 날카로이 이명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밤은 고즈넉이 침묵했다. 넘치도록 흐른 피도, 샐 수도 없이 행해진 죽음도, 얼핏 드러났던 작은 진실까지도 검은 어둠 속으로 휩쓸어 삼킨 채.
-누구라도 베어버릴 수 있었다. 한검도, 초란도, 설사 이 집 안 사람들 전부라도 베지 못할 것은 없었다.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꺾이고 마침내 목이 떨어진다 해도 산은 그 중 무엇도 거리끼지 않았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었을 터였다. 하다못해 그 길로 한 가(家)를 떠나 몸을 감출 수도 있었다. 산이 하지 못할 것은 진정 아무것도 없었다. 간절히 원하고 바란 끝에 결정만 내렸다면.
그러나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맡은 바 소임을 마치고 한검에게 결과를 고한 다음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 날 역시 꿈도 꾸지 않는 평안하고 깊은 잠이었다. 늘 그러했듯이.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긍지고 명예이며 정당함이다.
아직 살아있던 시절. 아버지는 산에게 말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애초에 검을 쥐지 않으리라. 검에 의지하지 않는 삶은 무엇보다 곧고 올바르며 숭고하다. 무가에 난 자라면 스스로 택하여 검을 휘두른다. 피와 죽음을 행하고 그 무도함을 두 어깨에 짊어짐이 그들의 긍지일 터다. 허나 우리는 무엇도 아니다. 그러니 오직, 주인의 뜻에 충성하는 것만이 우리의 길이니라. 알겠느냐, 산아.
산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말을 들었다.
-주인을 선택하는 순간 너는 검이다. 그러니 그 선택만은, 산아. 네가 주인을 택하는 그 순간만은, 오롯이 네 의지이니. 영원토록 너의 것이다.
산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만족했을 것인가? 의도치 않은, 배반이나 다름없는 죽음 앞에서도 그 마음은 충분히 기꺼웠을까? 주인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주인의 명에 따라 죽음까지 받들어 모신, 아버지는? 그렇다면 어머니는, 누이들은, 산의 가족들은? 남궁 가(家)는 그 뜻에 따라 명예롭게 죽었는가?
산은 알 수 없었다. 이제 물어볼 이도 남지 않은 이상 영원토록 알 수 없으리라. 일평생을 건다 하더라도 결코 찾을 수 없는 답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 의문은 여태껏 산 안에 남아 있었다.
“란 아가씨는.”
그리하여 산은 그저 웃었다. 활짝 펼쳤던 부채를 거두어 툭툭 턱을 두드리며, 산은 순순한 웃음을 머금었다.
“항상 제게만 무정하시다니까요.”
산은 고개를 들어 짐짓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끝없이 너른 하늘은 푸르고 높고 하염없이 맑았다.
“이 넓은 세상 아래 남은 혈육 하나 없는 산이 불쌍하지도 않으신 모양입니다. 하기야…… 이 몸은.”
그 밤 이후 산은 줄곧 혼란 속을 헤매었다. 산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했으며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알지 못했다. 가문의 원수를 모시고 그 명을 받드는 이 상황의 옳고 그림조차 가리지 못 하는 아둔한 혼란.
-주인을 택하는 것. 그 선택만은 모다 네 것이다.
산은 아직 주인을 택하지 않았다. 오갈 데 없이 한검의 명을 따르고는 있지만 산은 아직 그를 모신다고 결정한 적이 없다. 한검을 주인으로 선택하고 충성한 이는 다름 아닌 산의 아버지다.
-주인의 명이라면 죽음조차 기꺼워야 하느니.
그리고 아버지는 한검의 명에 따라 죽었다. 하늘도 땅도 온통 붉게 타오르던, 피를 머금어 타오르는 불꽃만이 뜨거울 만큼 작열하던 그 그믐날에.
정작 산은 그 그믐날의 일을 무엇도 기억하지 못 했다. 모든 것이 어렴풋했다.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듯도 하다. 어머니와 누이들의 비명을 들으며 정원을 달렸던 듯도 했다. 그도 아니라면 진즉에 칼을 맞아 쓰러졌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산이 되새기는 그 수많은 장면들 중 과연 진실이 있는가. 무엇이 망상이고 무엇이 기억일까. 그 날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이제 답을 찾을 수도 없건마는. 아버지의 마지막 마음도, 어머니와 누이들의 죽음에 관한 진상도, 진실은 모두 시간 속에 묻혔다. 오직 산만이 남아 홀로 삶을 떠돌고 있다.
-나는…… 대체 왜.
제대로 땅을 디디지도 못한 두 발은 혼란에 겨워 허공을 떠돈다. 산은 늘 땅 위에서 한 걸음 떠 있는 듯 바람처럼 흐르며 살아왔다. 그를 얽매고 있는 무수한 의문들을 결국 풀지도, 차마 잘라내지도 못한 채 긴 세월 동안 한검의 명을 따라 검을 휘두르고 초란을 지켰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산은 초란을 보았다. 산의 시선이 닿은 바로 그 곳에 초란은 서 있었다. 차라리 푸르게 느껴질 만큼 검디검은 눈이 산을 보고 있다. 속을 알 수 없이, 그저 무심하고 검다.
산을 바라보는 초란의 눈은 언제라도 그랬다. 대역 죄인을 질책하며 꾸짖는 그 시선은 그녀답게 하염없이 올곧다. 그래서 초란을 감히 마주볼 때면 산은 늘 웃어야만 했다. 뒤틀리는 속을, 주체할 수 없는 혼란을, 정체 모를 감정을 웃음으로 감추기 위해.
“감히 하늘에 거역한 잔악무도한 죄인이라, 본디 귀한 아가씨께 차마 다가설 처지도 못 되는 천한 것이었지요.”
란아.
-그 것은 정말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 단 하루를 제외하면 초란은 언제나 산에게 ‘란 아가씨’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산은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멀고 아득하기 만한 그 옛날, 조그만 손을 뻗어 소맷자락을 쥐는 소녀에게 고개 숙여 답하던 어린 소년처럼. 산은 그 자신을 제하면 누구도 듣지 못할 부름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란아, 나는 왜. 란아, 나는, 대체 왜.
“그런데 란 아가씨. 이대로 산책은 나가지 않으실 참입니까? 이리 지체하시다간 대문 밖을 나서기도 전에 해가 저물고 말겠습니다.”
-이 곳에 남아있는 걸까.